바보야, 문제는 돈이 아니라니까 [고미숙님]
붕어가 말하길, 약간의 물만 주면 살아날 거 같다고, 그래서 내가 말했죠. 오월의 왕에게 가서 촉강의 물을 밀어 보내주지. 그러자 붕어가 발끈 화를 내며 지금 내가 필요한 건 한 되의 물인데, 그렇게 말하다니 차라리 나를 건어물전에서나 찾을시오! 이것이 장자식 경제학이다.
중요한 건 돈의 액수가 아니다. 지금 당장 생명을 살리고 삶을 창안할 수 있는가, 핵심은 그것이다. 화폐에 중독되면 이 지점에서 맹목이 된다. 현장이 보이지 않고 돈의 액수, 화폐의 규모만 보이기 때문이다. 그때부터 화폐가 생명을 잠식하기 시작한다. 그러므로 이 지점에서 멈춰 서는 것, 그것이 증여의 출발이다. 과격할 것도, 급진적일 필요도 없다.
"내가 왜 이토록 돈을 열명하지?"
라는 질문 하나면 족하다. 대신 집요해야 한다. 그러면 곧 화폐의 왕국이 선사하는 ' 거대한 허무'와 마주하게 될 것이다. 그 순간 슬그머니 발을 빼면 된다. '슬그머니' 가 중요하다.
다만 신체적 동선, 마음의 파동을 바꾸면 된다. 화폐를 열망하지 않는 신체들이 자꾸 늘어난다면, 그것이 자본에는 치명타가 될 것이다. 또 화폐를 열망하지 않고도 태평하게 살아갈 수 있다면 글로벌 경제의 요동에도 아무런 동요없이 살아간다면, 이보다 더 '과격한' 혁명이 있을까?
"니가 깜짝 놀랄 만한 애기를 들려주마, 나는 별일없이 산다"는 장기하의 노랫말처럼, 화폐와 영성이 마주치는 지점도 바로 여기다.
처음 교수 임용을 포기하고 백수의 길로 들어설 즈음, 나 자신에게 물었다. 왜 교수가 되고 싶은가? 물론 교수라는 직업이 주는 소속감이나 안정감도 중요하다. 하지만 그건 포말에 불과하다. 핵심은 가르치고 배우는 일을 하고 싶어서다. 그것이 나의 '신생'이다. 그렇다면 이 활동과 관계가 가능하다면 굳이 교수가 되기 위해 몸 부림치지 않아도 된다. 는 생각이 섬광처럼 지나갔다. 그 섬광 같은 깨달음이 나로 하여금 '지식인공동체'라는 길 위로 나서게 해주었다. 돈을 비롯하여 기타 다른 문제는 그 다음에 풀어가면 된다. 대개는 거꾸로 생각한다. 일단 지위와 연봉이 해결되어야 삶의 비전을 탐구할 수 있다고, 하지만 앞서 언급했듯이 그런 케이스는 거의 보지 못했다. 돈과 지위가 해결되면 그 다음에 거기에서 살아남는 것이 목표가 된다. 더 많이 ! 더 높이!
사람들이 백수를 두려워하는 건 노후 때문이기도 하다. 지금 이 순간에도 각종 매체에서 고령화와 노인빈곤에 대한 담론이 쉬지 않고 쏟아진다. 하지만 잘 생각해보자. 노후대책은 화폐만으론 절대 불가능하다. 반드시 관계망이 있어야 한다. 삶이란 '관계와 활동' 이라는 사실을 환기하라. 좋은 아파트와 연금보험이 있으면 가능할까? 결코 그렇지 않다. 그때 가장 두려운 건 고립과 단절이다.
소비에서 해방되면 도심 하가운데서도 넉넉하게 살 수 있다는 것. 더 중요한 건 불안이 사라진다는 사실이다. 그러니까 불안은 가난이 아니라 소비에 대한 집착의 산물이었던 셈이다.